퍼펙트 케어, 완벽한 돌봄에 극단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불편한 진실을 볼 수 있다. 사회복지가와 마피아,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일까.
완벽한 돌봄, 불편한 진실.
간혹 영화를 보다 보면 결말이 이렇게 끝나선 안되는데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물론 그 결말이 감독 또는 작가가 생각했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결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청자는 다양하고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는 이들도 분명히 있지 않겠는가.
이 영화의 소재는 굉장히 불편한 영화였다. 주인공 말라는 혼자 사는 독거노인을 법의 집행 명령을 이용하여 강제로 요양원에 입원(또는 감금)시키고 그 노인의 재산은 대리인이란 이름으로 처분하여 이득을 취한다. 노인들은 말라의 퍼펙트한 케어로 사실상 죽을 때까지 요양원에서 나오지 못하고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게 된다. 자신들의 재산은 하나둘씩 말라의 것이 되며.
말라는 이번에도 속된 말로 호구를 잡아 요양원에 넣는다. 그러나 말 그대로 진짜 호랑이의 입을 건드리게 된다. 말라가 요양원에 넣은 노인은 마피아의 엄마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말라는 더 이상 노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닌 마피아를 상대하게 되고, 자신은 물론 애인까지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말라는 위기 때마다 이를 극복하고 오히려 마피아에게 한 방을 세게 날린다.
불편하지 않은 말라의 죽음.
나는 사실 마피아를 응원했다. 자신의 엄마가 요양원에 감금되어 나오지 못하게 됐는데 어느 자식이 가만있겠는가. 그러나 결국엔 마피아도 말라의 끈기와 생명력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오히려 말라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시간이 지나 말라는 대규모의 퍼펙트 케어 프로젝트를 지속하게 되고, 오히려 사회에서는 명망 높은 사회복지가가 된다.
앞서 언급한 결말에 대한 얘기를 다시금 할 때다. 영화는 이렇게 말라를 성공한 사업가로 끝내선 안됐다. 우리네 삶에는 권선징악이라는 가르침이 있지 않은가.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한다.'라는 단순하고도 심오한 가르침은 만국 공통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영화 중반부터 말라가 더욱 잘 되어가는 모습에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다.
다행히도 이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진정 완성되는 영화였다. 감독은 이렇게 오랫동안 끌고 온 찝찝함을 영화 마지막에 말끔하게 해소시켜준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사막 위에서 발견한 오아시스와 같았다. 이 영화의 오아시스는 말라의 죽음이었다.
잡설
선과 악의 모호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영화다. 명망 높은 사회복지가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마피아, 누가 보아도 선과 악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부도덕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회복지가와 자신의 어머니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마피아를 보면 비치는 선과 악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진실이다. 세상은 단편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다. 선과 악의 양면, 진실과 거짓의 양면이 넘실대는 세상에서, 세상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공간지각 능력을 키우는 연습에 소홀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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