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한자는 '먼저 선' 그리고 '날 생'으로 쓴다. 학문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앞장서서 길라잡이 해주는 사람이다.
줄리아 로버츠 판 '죽은 시인의 사회'.
줄리아 로버츠 판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는 것 같았다. 1954년, 결혼이 학생들의 꿈이어야만 했고 전업 주부가 최고의 직업으로 생각하는 시대였다. 학교에서 교사들은 더 좋은 주부가 되기 위한 방법들을 가르쳤다. 훌륭한 부부가 되기 위한 교양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전부였고, 학생들은 교수, 변호사, 의사 등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그것으로 만족했다.
줄리아 로버츠는 이와 같은 관습을 깨버리고 진짜 학생들의 꿈을 응원하는 교사였다. 30대에 결혼을 하지 못한 그녀는 학생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단지 결혼하지 못한 여자일 뿐이었다.
그녀는 이런 학생들의 시선에 힘들어했지만 자신의 교육 가치관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수업은 교재를 사용하지 않고 토론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져왔으며, 학교 안이 아닌 밖에서 자유롭게 상상하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녀는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꿈을 좇을 구 있도록 바꿔놓았고, 그녀가 떠나는 순간까지 학생들은 그녀를 따랐다.
학문이 전부가 아닌 인생을 가르치는 선생.
지금의 교육 기관은 학문이 아닌 취업을 위한 과정으로 변모하고 있다. 당연히 시대가 변함에 따라 교육 과정도 그 정의도 바뀔 수 있지만, 이제는 꿈을 찾도록 도와주는 선생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오히려 꿈의 정의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학생이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과목의 성적이 좋으니 어떤 과로 진학을 하고, 어떤 학과가 취업이 잘되니 그 과로 진로를 정해주는 것을 학생들의 바라는 꿈인 양 치부해버린다.
'선생'의 한자는 '먼저 선' 그리고 '날 생'으로 쓴다. 단순히 학문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인생을 앞장서서 올바른 길로 길라잡이 해주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맞지 않을까. 그러니 어쩌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직업이지만 그 사명감이 없으면 절대로 잘 해낼 수 없는 직업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 제대로 만난 선생님 한 분이면 내 인생이 옳은 방향으로 가는 데에 더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없다. 줄리아 로버츠는 인생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잡설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한 때 교직 이수에 대한 고민을 했던 적이 있다. 그 고민의 의도는 단순했다. 전공과목을 듣고 싶지 않았고 교직 이수 과목이 절대 평가 비중이 높아 학점을 잘 받을 수 있다는 메리트 하나였다. 그다음은 나도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란 막연한 기대감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한심한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내가 봐왔던 '선생님'들 대부분이 줄리아 로버츠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기에 더욱 쉽게 생각했던 것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진짜 '선생님'을 보고 나니 그 시절 했던 생각이 유치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고쳐 쓰지 못한다."란 이야기가 있다. '선생님'은 그런 사람을 올바른 방향으로 향할 수 있도록 고치는 인간 정비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줄리아 로버츠 같은 진짜 '선생님'들이 많아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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