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말도, 밤 말도 모두 듣는 기술자의 삶. 모든 걸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초대받지 않은 대화를 엿들은 죗값은 가혹했다.
대화를 엿듣는 기술자
고전이라 불리기 적절한 년도의 영화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1990~2000년대의 영화를 즐겨보는 나로서는 1974년작인 ‘컨버세이션’은 오래간만의 고전 영화였다. 간혹 오래된 영화가 끌릴 때가 있다. 연남동에서 핫한 퓨전 중식집을 찾아 웨이팅 하며 어떤 메뉴를 고를까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을지로역에 내려 요즘은 보기 힘든 고기튀김을 파는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노포에서 연태고량주 한 잔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래서 무수히 많은 트렌디한 영화들 사이에 있는 예스러운 영화를 골랐다.
영화의 주인공은 진 핵크만이다. 항상 노년과 중년 사이의 역할만 영화 속에서 봐왔던 터라 항상 그 모습인 줄 알았지만 프로필을 찾아보니 1930년대생으로 올해 93살의 어엿한 원로 배우였다. 그보다 신기한 부분은 키가 188cm라고 적혀있는데, 이런 신체 때문에 영화 속에서도 위압감이 느껴졌던 것 같다.
‘컨버세이션’은 고객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대상자를 도청하는 도청업자(?)인 진 핵크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진 핵크만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상자를 도청하고 있었다. 한 남성과 여성의 대화였고 그들은 자신들이 도청당하는 걸 의심할 정도로 무언가에 좇기고 있었다. 이 의뢰를 한 사람은 여성의 정부로 굴지의 기업 회장이었고,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던 회장은 진 핵크만에게 도청을 의뢰했다.
초대받지 않은 대화를 엿들은 죗값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그러나 진 핵크만은 낮말도 듣고 밤말도 듣는 사람이었다. 직업병인지는 몰라도 누군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항상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성당에서의 고해성사뿐이었다.
그런 그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광장에서 도청 중이던 남성과 여성의 이야기를 엿듣고 생각이란 걸 하게 된다. 평소엔 도청한 내용을 의뢰인에게 전달하기만 했다면, 이번엔 도청한 내용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그 장소로 향한다.
도청당한 여성이 정부에게 살해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 장소에서 정부를 기다린다. 그리고 들리는 어떤 소리. 그는 호텔 베란다로 향해 옆방을 살펴보는데 돌아오는 건 새빨간 핏자국이었다. 진 핵크만은 다음 날 정부의 회사로 찾아가 사실을 확인하려 한다. 정말 살해한 것이 맞다면 정의의 심판을 받아야 할 테니까. 그러나 그곳에 서있는 건 도청당한 남성과 여성이었다. 둘은 이미 도청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몰래 빌미를 흘렸던 것이다. 그렇게 진 핵크만은 처음으로 진실을 확인하고 좋은 일을 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불편한 진실만 안고 떠난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를 때 진 핵크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전화기부터 조명 그리고 바닥에 있는 장판까지 말이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자신을 도청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지배당하면서 결국 집에 있는 모든 것을 해체하기 이른다. 집의 형태는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소득은 없었다. 단지 스스로를 의심한 대가만 지불했을 뿐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진 핵크만은 마음을 달랠 트럼펫만 한 곡조 뽑을 뿐이었다.
잡설
대화를 엿듣고 그 내용을 전달하는 일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봤다. 나는 누군가 대화할 때 그 내용을 또 다른 이에게 전달하지 않는다. 전달 과정에서 의미가 왜곡될 수 있고, 그로 인한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흔히 우리들만의 비밀이라 일컫는 대화에 초대받지 못하게 된다. 나는 그 대화를 떠벌리기 좋은 아이로 낙인찍힐 테니까. 대화는 상호 간의 호흡이다. 그 말은 상호 간의 믿음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 우리끼리의 대화라고 협의됐다는 것이다. 대화를 전달할 의무도 권리도 없다. 그저 누군가 대화할 때 그 대화에 온전히 참여하고 그 자체로 끝내는 것이 중요하다. '환승연애2'의 지연을 보고 있자니 그런 애가 우리 무리에 들어오면 파탄나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는 전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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